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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5-05-16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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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난희는 1984년 여성 최초로 태백산맥을 겨울에 단독 일시종주했으며, 1986년 여성 세계 최초로 네팔 강가푸르나(7,455m)를 등정했다. 1989년 여성 최초로 백두대간을 종주했으며, 74일간의 태백산맥 단독 일시 종주기를 담은 <하얀 능선에 서면(1990년)>을 펴내 등산인들의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94년부터 지리산 자락에 터를 잡아 살고 있다. 2022년 백두대간을 선구적으로 알린 공로로 한국인 최초로 스위스 알베르 마운틴 상을 수상했다.
지금 세상은 온통 꽃으로 가득하다. 눈을 어디로 돌려도 꽃, 꽃들이 저마다의 모양과 색깔로 자기를 뽐내고 있다. 산에는 진달래, 산벚, 생강, 히어리, 길무료야마토
가에는 벚꽃, 복숭아꽃, 조팝꽃, 땅에는 민들레. 제비꽃, 현호색, 별꽃, 양지꽃 괴불주머니 등등. 온통 꽃, 꽃들. 어디에 숨어 있다가 한꺼번에 경주하듯이 앞 다투어 세상과 만나고 있다. 각각의 수많은 아름다움을 보며 매년 이맘때만 되면 처음 접한 세상처럼 놀랍고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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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 능선에서 드러나는 호남정맥 산줄기.

마음이 불편한 것은 산불로 인해 수많은 생명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멀고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산불 소식에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잔뜩 봄을 준비한 뭇 생명들이 피할 수 없는 화마에 속수무책으로 당했을 걸 생각하면 가슴이 쪼그라드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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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불편해서 산에 가는 것도 조심스럽고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것도 조심스럽다. 매일 가는 불일폭포 산길이야 마당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기에 불편 없이 다니기는 한데, 이맘때 한 번씩 가고는 했던 산을 정해 놓고도 망설였다. 결국 그 산의 꽃들이 눈에 삼삼해서 배낭을 꾸린다. 배낭에 화기가 없는지 몇 번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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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나라 어느 산을 가더라도 마찬가지겠으나 아는 만큼 보인다고, 내가 알고 있는 진달래가 가장 많이 피는 곳 중 한 곳을 선택했다. 이번에는 구례 사성암 뒷산인 오산과 동주리 봉이다. 나는 항상 지금 가는 산이 가장 좋은 산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항상 가장 좋은 산을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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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을 장식한 진달래.

오늘은 구례 오산과 주변 능선과 동주리봉이 가장 좋은 산이다. 다른 산들과 마찬가지로 언제 가든 좋지만 이맘때의 능선을 장식하는 진달래를 만나는 재미가 아주 그만이다. 진달래를 만나기 전에 먼저 사성암을 만나야 한다.
살기 위해 사성암까지 올라온 소
구례 사성암은 거대한 바위를 기둥이나 주춧돌로 이용해서 지어진 사찰이다. 바위와 어우러진 사찰이 특이하고 풍광이 빼어나서 불자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인기 있는 절이다. 특히 태극으로 휘도는 섬진강과 구례의 조각보 같은 들판이 내려다보이는 것이 일품이다.

구례 섬진강의 벚꽃.

무엇보다 유명해진 이유 중 하나가 있다. 2022년 큰 비로 섬진강이 넘치면서 구례와 화개장터에 큰 물난리가 났다. 그때 구례읍이 거의 잠기면서 피해가 많았는데 사람은 물론 가축 피해도 엄청났다. 그중 일부 소들은 강물에 휩쓸려 가면서도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섬진강 하구까지 떠내려갔다가 주인을 찾은 경우도 있었다.
당시 일부 소들은 지붕 위로 올라가서 살아나기도 했지만 가장 극적인 것이 소들이 스스로 물을 피해서 높은 곳에 있는 사성암까지 올라온 것이었다. 사성암까지 찻길로 걸어 왔는지 그냥 산길을 헤치고 왔는지는 모르지만, 오로지 살아야 한다는 한 가지 일념으로 그 가파른 산길을 올라온 것이다.
생명은 얼마나 위대한가? 그들은 살아남았고 매스컴 세례까지 받았다. 스스로 살아낸 소들로 인해 소 주인도 이득이 있었지만 사성암 또한 이득이 되었다든가? 소가 물을 피해 올라온 사찰로 유명해지며 관광객이 몰렸다, 결론적으로 영리한 소들로 인해 여러 사람이 득을 보았다.
사성암에서 조금 오르면 오산이다. 오산은 지리산과 마주하는 자라 모양의 산이라고 해서 자라 '오鰲'자를 써서 오산이라고 했단다. 오산에서는 노고단과 반야봉과 왕시루봉이 손에 잡힐 듯하다. 왕시루봉 뒤로 자세히 보면 천왕봉도 고개를 빼꼼 내밀고 오산을 바라보고 있다.

능선의 바위에 붙어 사는 부처손과 진달래.

이때부터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진달래가 와글와글 피어나 산을 환하게 밝힌다. 다 같은 진달래라고 해도 각자 개성이 넘친다. 표정이 저마다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는 재미도 그만이다.
하지만 모두 나를 향해 환하게 웃고 있다. 그 표정들을 보며 나는 반갑고 고마워서 환하게 웃어 준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그 혹독했던 겨울 동안을 무표정으로 일관하고 견디며 안으로는 꽃을 피워낼 준비에 얼마나 치열했으랴. 저 나무 내면에는 무엇을 숨기고 있기에 저리도 찬란함을 한꺼번에 토해 내는가? 나는 겨울을 이기고 꽃들을 피워 낸 나무들을 보면 매번 궁금하다. 아마 내년에도 나는 궁금해 할 것이다.
무리지어 피어 있는 진달래 능선을 지나다 보면 꽃 분홍으로 물들 것 같은 눈이 조금 시원해지며 히어리 군락으로 접어든다. 우리 불일에는 이미 진 꽃이다. 가끔 생강꽃도 남아 있다. 꽃이 당연히 아름답지만 그에 못지않게 아름다운 것이 나무의 생살을 뚫고 올라온 새 순들이다. 그 연약한 연두가 마음을 사로잡는다.

사성암 도선굴. 도선국사가 수도했다고 하여 이름이 유래한다.

이럴 때 세상에 나가고 싶지 않다
나는 꽃에 보내는 인사와 새 잎에 보내는 인사가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절대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나온 본능인데 꽃에는 환하고 크게 웃고 잎에는 은은한 미소로 기특해 하는 표정인 것이다.
꽃들에는 '안녕' 하고 크고 반갑게, 새 잎들에는 속삭이듯 '그래 왔구나' 한다. 꽃은 환한 등불이라면 새 잎은 뭐라고 해야 할까? 은은한 촛불? 아니 은하수 같다고 해야 할까? 꽃은 단 한 송이만 피어나도 주변을 환하게 해주는 힘이 있다. 물론 새 잎도 세상을 비추는 힘이 있는데 느낌은 다르다. 모르기는 하지만 꽃은 단 며칠이라 더 찬란하고, 새 잎은 시간이 지날수록 기세가 등등해지는 탓인가?

흔들릴 것 같지 않은 흔들바위.

이제 능선의 전망도 조금 바뀌고 있다. 지리산은 여전히 지척인데 천왕봉과 영신봉에서 시작된 남부능선이 더 가까워지고, 노고단과 반야봉은 여전한데 그 사이 능선들은 왕시루봉 뒤에 숨어버렸다. 대신 호남정맥의 일부가 남동쪽으로 불쑥 나타났다. 산길 곳곳에 전망대를 설치한 친절을 보였지만 산에 이런 설치물이 나는 불편하다.
동주리봉에 도착해서 조금 쉬며 아래 세상을 내려다본다. 고속도로로 차들이 질주하고 가끔 기차도 긴 울림을 주며 지나가고 동네에서는 불조심을 알리는 스피커가 울리고 섬진강이 유유히 흐른다. 벚꽃놀이 온 사람들의 웃음소리도 들린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이럴 때 세상에 내려가고 싶지 않다. 하지만 나는 항상 내려오고야 말았고 그리고 안도했다.

소나무와 잠시 교감 중이다.

동해마을로 하산한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용서폭포가 있을 것이다. 예전에 빙벽과 암벽을 동시에 했던, 믹스 클라이밍을 했던 곳인데 요즘도 등반을 하는지는 모르겠다. 평소 폭포에 물은 쏟아져 내리지 않고 스미듯 물이 내려오는 폭포로 겨울에는 얼기도 해서 믹스 클라이밍이 되었는데 아련한 과거가 되어버렸다.
내려오며 야생 젠피잎과 두릅 몇 개를 발견해서 저녁거리로 챙긴다. 이제 세속이다. 벚꽃이 만개한 구례섬진강 길을 걸으며 하루를 잘 보냈다고 입에 달콤한 침이 고인다.

사성암에서 내려다본 섬진강과 구례 들판.

월간산 5월호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