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들어 이제는 중년의 딸이 늙은 엄마를 돌보는 관계로 바뀌었지만, 아픈 할머니가 된 엄마는 더 자주 웃는다. 게티이미지뱅크


사춘기 때 나의 다짐은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는 거였다. 숨 막히는 집안 공기를 만들어내던 권위적인 아빠, 숨죽이고 순종하던 엄마가 답답하고 화가 났다. 엄마의 인생엔 가족 모두가 있었는데 오로지 엄마만 없었다. 그렇게 살기 싫었고, 엄마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떻게든 자기 인생에서 멀리 떨어진 자리로 보내려고 시골에서 소도시로, 소도시에서 대도시로, 더 먼 곳으로 훨훨 날아가라고 계속 내 등을 떠밀었다.
사이다릴게임함께 산 기간이 짧아 서먹했던 엄마와 가까워진 건 엄마가 노인이 된 뒤부터다. 관계가 역전되어 이제는 내가 엄마를 돌본다. 젊을 때부터 병치레가 잦던 엄마는 이제 아이처럼 작아지고 더 아픈 할머니가 됐지만, 어찌 된 일인지 더 자주 방긋방긋 웃는다. 엄마의 웃는 얼굴이 보고 싶어 나는 툭하면 실없는 소리를 하고, 귀가 어두워 시답잖은 내 농담이 바다이야기APK 잘 들리지도 않을 텐데 엄마는 더 자주 함박웃음을 짓는다.
엄마 팔순 때는 자서전을 만들어 가족이 돌려 읽었다. 자서전을 만들면서 엄마보다는 내가 더 얻은 게 많다. 엄마처럼 살지 않겠노라 다짐했던 나는 정작 엄마를 잘 몰랐다. 평생 ‘엄마’라고만 알아온 존재 안에서 죽다가 살아난 아이, 가난으로 학교를 못 다녀 섧게 울던 10대 소녀, 바다이야기부활 고통에도 무너지지 않고 부단히 다시 일어난 사람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자기 몫의 삶을 힘껏 살아낸 선배 여성으로 엄마를 바라볼 수 있게 됐다.
나는 엄마의 자서전 만들기를 거들었을 뿐이지만, 작가 김효선은 엄마의 곡절 많은 인생을 직접 기록해 ‘오춘실의 사계절’이라는 사랑스럽고 다정한 에세이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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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춘실의 사계절 l 김효선 지음, 낮은산(2025)


열네살부터 염전, 과수원, 식당, 목욕탕, 학교 등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40년을 일한 엄마 오춘실은 환경미화원으로 정년퇴직한 뒤 딸인 저자와 새롭게 만난다. 일하다가 허리를 다친 엄마와 직장에 릴게임 서 마음이 부서진 딸. 오랜만에 살림을 합친 뒤 곧잘 갈등했던 두 사람은 함께 수영장에 다니면서 “일하는 여자라는 공통점”으로 말문을 텄다. 저자의 빼어난 문장에 실려 내 눈앞의 사람처럼 생생하게 떠오르는 엄마 오춘실은 억세게 고생하면서 살았지만 “기분 좋아지는 일의 권위자”다. 토마토를 설탕에 재워놓고 바람 불어 시원하면 행복하고, “인생은 재밌게 사는 겨” 하면서 쓰레기도 치우고 폐지를 주우며 즐겁게 걷는다.
청소 일을 그만둔 뒤에도 잠꼬대로 “나한테 왜 그러는 거예요! 감시하고! 무시하고!” 소리를 지르며 발길질을 할 정도로 일터에서 당한 수모와 횡포가 클지언정 오춘실은 자기 일을 좋아했다. “돈이 삼, 상쾌한 게 칠”이라며 돈 위에 보람을 뒀다. 저자는 그런 엄마의 마음을 “삶에서 도망치지 않으면서 그 삶을 손에 쥐는 법”이라고 멋지게 표현했는데, 책장을 넘길 때마다 오춘실의 그 비법이 솔솔 새어 나온다.
중년의 딸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오춘실에게서 자기 엄마의 모습을 볼 것 같다. 오춘실처럼 내 엄마도 아침에 일어나면 잘 때까지 한번 눕지도 않고 종종거린다. “세상에 그렇게 당하고서도 아직도 세상을 알고 싶어 하는” 오춘실처럼 내 엄마도 길가의 꽃을 볼 때마다 어김없이 멈춰 서고 아낌없이 감동한다. 남들의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뒤뚱거리며 새로운 것을 기꺼이 배우려 한다. 삶의 비법을 평생 몸으로 깨친 노년의 선배 여성들이 대개 다 그렇지 않을까.
저자는 수영장에서 엄마를 좀처럼 풀어놓지 못해 “엄마 혼자 계시게 해도 된다”는 말까지 듣는데, 엄마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엄마가 선을 넘는 말을 할까 봐, 매너 없는 아줌마로 찍힐까 봐” 자신을 걱정하는 게 아닐까 되짚어보는 대목에선 읽던 나도 뜨끔했다. 엄마와 함께 외출할 때 종종 엄마가 할 말까지 내가 불쑥 나서서 대답하곤 했던 경험이 떠올라서다. 내가 가만있으면 엄마는 “소음이 많아 잘 듣지 못하니 조금만 크게 말씀해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한다. 노년의 부모를 거드는 중년의 자녀가 할 일은 저자 말마따나 “엄마가 실수하지 않게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실수한 엄마 옆에 같이 서 있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저자는 엄마와 함께 수영장에서 “어디가 아프셔?”가 인사인 나이 든 여자들의 세계를 유영하면서 연약하고 상한 몸으로 느리게 수영하는 할머니들, 엄마 같은 사람들을 좋아하게 됐다고 말한다.
“나는 변변찮은 여자 선배를 한명도 알지 못했다. 오래 일한 여자들에겐 다 저마다의 곡절이 있었다. 그제야 좀처럼 비켜 주지 않고 당당하게 길을 막고 수영하는 할머니들이 왜 그렇게 좋았는지 알 것 같았다. 변변치 않을지라도 헤엄치고 싶다.”
저자는 “갈라진 마음을 항불안제로 메우고”, 엄마는 “금 간 뼈를 공구리로 붙인 채” 나란히 물 위에 누워 헤엄친다. 저자의 말대로 “우리는 회복되지 않은 채로 헤엄칠 수” 있다. 속도가 느려도 함께할 수 있다.



내가 잘 안다고 생각했던 부모가 어떤 인생을 살아와 지금에 이르렀는지 새롭게 바라보려는 시도는 해볼 수 있겠다. 게티이미지뱅크


이 책의 모녀는 서로에게 지극하지만, 어떤 엄마와 딸은 나이가 들어도 서로를 힘들어한다. 모두가 다 화해를 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내가 잘 안다고 생각했던 부모가 어떤 인생을 살아와 지금에 이르렀는지 새롭게 바라보려는 시도는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소설가 김애란의 문장을 살짝 바꿔 말하자면, 나이가 들면 이미 안다고 생각했던 대상을 새롭게 배워나가면서 삶에 놀라게 된다. 자식의 자리가 아니라 앞서 걸어간 선배의 뒤를 따라가는 후배 여성과 남성의 자리에서 부모를 새롭게 알기에 중년은 딱 좋은 나이다.



작가, 전 여성가족부 차관 기자 admin@reelnara.info